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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할 토라 강의 - 파라샤트 핀하쓰

בס''ד


바미드바르 25:10 – 30:1

 

하쉠의 영광을 위한 핀하쓰의 의로운 열성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닥칠 파괴적인 재앙을 막아내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일러라. 여기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준다.”(바미드바르 25:12)

 

의사가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팔다리를 제거해야 하기도 하는 것처럼, 핀하쓰는 나머지 이스라엘 아들들을 살리고자 두 죄인을 죽였습니다.

“타격으로 죽임당한, 곧 미드얀 여자와 함께 타격으로 죽임당한 이쓰라엘 남자의 이름은 쌀루의 아들 지므리였다. 그는 쉼온 가문의 지도자였다.”(바미드바르 25:14)

 

토라는 왜 핀하쓰가 보상을 받고 그의 행위가 온 민족을 속죄했다는 사실을 배울 때까지 우리에게 죄인의 이름을 알려주길 기다렸던 것일까요?

그것은 핀하쓰가 재앙을 예방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그의 행동에 대한 세부사항을 알 수 없던 것에 있었습니다.

큰 구원을 깨달은 백성들은 가해자가 한 지파의 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안도와 위로를 느꼈습니다.

 

지므리의 이름과 혈통이 언급되는 것은 쉼온 지파에게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으나, 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쉼온(שמעון)이라는 이름은 ‘저기에 악이 있다(שם עון)’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쉼온 지파는 이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그들이 실제로 불결함에 취약해 그것에 유혹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했습니다.

 

토라는 ‘타격으로 죽임당한, 곧 …함께 타격으로 죽임당한’이라는 이중 표현으로 이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핀하쓰가 지므리를 육체적으로 죽이기 전에 이미 지므리는 영적인 영역에서도 타격을 입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기에 지므리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었으며, 정당방위를 위해 핀하쓰를 죽이려고 시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리석음에 빠진 지므리는 거룩한 진리를 버리고 불결함에 집착하기로 결정했을 때 자신의 영적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 죄악을 저지른 여성의 이름인 코즈비(כזבי)에서 그에 대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코즈비라는 단어의 어원이 ‘거짓’을 의미하는 코제브(כוזב)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해 지므리는 진실보다 ‘거짓’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격으로 죽임당한 미드얀 여자의 이름은 쭈르(그는 미드얀 가문의 민족 지도자였다)의 딸 코즈비였다. ”(바미드바르 25:15)

 

토라는 이스라엘 자손을 멸망시키려는 그 불결한 행위가 얼마나 멀리까지 진행됐는지를 강조하기 위해 그녀의 혈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자손을 죄로 물들게 하기 위해 불법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목적으로 미드얀 공주까지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쉠께선 모셰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습니다:

“미드얀인들을 괴롭게 하라. 그리고 너희는 그들을 쳐라.”(바미드바르 25:17)

 

미드얀과 모아브는 각각 이스라엘 자손을 꾀어서 죄를 짓게 하려고 시도했지만 모셰가 미드얀에게 복수하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모아브도 죄가 있었지만 불법적인 관계를 맺을 목적으로 공주까지 넘겨줄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그들의 중대한 행위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그들의 깊은 증오와 파괴의 열망을 보여주었고, 미드얀의 파괴는 그래서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모아브에서는 후에 의로운 개종자인 루트가 나올 운명이었기에 하쉠께선 그들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미드얀의 계획은 이스라엘을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멸망을 가져와 하쉠으로부터의 연결을 끊어내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어떠한 자비도 허용하지 않고 엄중한 복수를 해야 마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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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브 여인들과의 불륜 관계와 우상 숭배에 대한 처벌로 이스라엘 아들들에게 재앙이 내려져 민족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재앙의 여파로 하쉠께선 모셰와 아하론에게 이스라엘 아들들을 세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인구 조사의 결론에서 토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모셰와 코헨 아하론이 씨나이 광야에서 이쓰라엘 아들들을 세었을 때의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는 하쉠께서 ‘그들은 광야에서 반드시 죽고 예푸네의 아들 칼레브와 눈의 아들 예호슈아 외에는 그들 중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르셨기 때문이다.”(바미드바르 26:64-65)

 

이집트를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가는 길에 그 땅을 정찰하기 위한 12명의 정탐꾼이 파견되었었습니다.

이들 정탐꾼 중 열 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가지고 돌아와서 약속의 땅을 거부함으로써 이스라엘 아들들에게 죄를 짓도록 만들었고 오직 칼레브와 예호슈아만이 그 부정적인 보고에 반박하려 시도했습니다.

구절은 토라가 인구 조사를 다시 할 당시 그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은 여전히 컸으며, 범죄한 자들이 죽었어도 이스라엘은 광야의 불결함으로 인해 멸망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죽어야 한다는 법령은 그 세대의 남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쳤으며, 그 세대의 여자들에게는 아니었는데, 남자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땅은 여성적 거룩함의 측면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여성들도 이스라엘 땅에 대한 강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광야의 첫 세대에서 여자들 외에는 남자는 두 사람, 예호슈아와 칼레브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땅의 위대함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했기에 처벌을 면하고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유대 법원에서는 증언을 확립하기 위해 금지된 행위에 대해서 두 명의 남자증인이 출석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호슈아와 칼레브는 다른 사람들의 멸망이 ‘광야에 존재했던 불결한 힘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의 결과라는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불결함은 거룩함을 뒤따르며, 죄 앞에서만 힘을 얻습니다. 예호슈아와 칼레브는 이 사실에 대한 분명한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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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쎄프의 아들 므나셰 가문들 중에 므나셰의 고손이자 막히르의 증손이며 길아드의 손자이자 헤페르의 아들인 쯜로픅하드의 딸들이 가까이 나아왔다. 그의 딸들의 이름들은 막흘라, 노아와 호글라와 밀카와 티르짜다.”(바미드바르 27:1)

 

이스라엘 땅을 크게 사랑했던 위대한 여성들 중에는 쯜로픅하드(슬로브핫)의 딸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갖고 나아갔던 이 의로운 여인들은 거룩함에 가까워질 가치를 지녔으며, 이는 그녀들이 ‘앞으로 나아왔다’라는 표현이 아닌 가까이 나아왔다라는 구절의 강조로 분명합니다.

 

이 구절은 그녀들이 자신들의 아버지 쯜로픅하드를 포함한 의로운 자들의 후손이라는 긴 증거들로 혈통을 추적합니다.

조하르 발락 205b에서는 쯜로픅하드의 유일한 죄와 그가 광야에서 죽은 이유가 모셰에 대해 말했던 것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에 대한 암시는 딸들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하쉠을 반대하려고 모였던 회중, 곧 코락흐의 회중에는 없었으니 이는 그의 죄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들들이 없었습니다.”(바미드바르 27:3)

 

‘광야에서’를 뜻하는 바미드바르(במדבר)는 단순한 의미로는 ‘광야에서’를 의미하지만, 이 구절에서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이 모셰에 대해 반대하는 말의 결과였음을 나타내는 ‘말로써’를 의미하는 ‘베메다베르’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쯜로픅하드(צלפחד)라는 이름은 ‘두려움의 그늘’이라는 의미의 두 단어(צל-פחד)로 나뉩니다. 이것은 그가 ‘힘’이나 ‘심판’의 속성에 영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비슷한 의미를 지닌 이름인 브짤엘(בצלאל)은 ‘하쉠의 그늘에서(בצל-אל)’라는 의미로 나뉠 수 있는데, 미슈칸 건설에 책임을 진 그였던만큼 친절에 뿌리를 둔 의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절에서 얘기하는 ‘그의 죄’는 에덴 정원에서 알게 하는 나무를 먹게 하는 죄를 범하게 하기 위해 언어의 능력을 사용했던 뱀과 같이 모셰를 향해 부정적인 말을 한 죄였습니다.

그러나 쯜로픅하드는 죽음으로 속죄 받을 죄를 지었으나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였습니다. 토라가 그의 혈통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요쎄프의 아들인 므나셰까지 언급하는 것은 그의 의로움을 입증해주는 의미였고, 그로부터 연결된 각 세대의 사슬도 의로웠다는 의미였습니다.

쯜로픅하드의 딸들 역시 거룩함에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말로 암시된 바처럼 평생동안 그러한 수준의 거룩함을 유지했습니다:

“그녀들은 서서 회막 입구에서 모셰 앞에, 코헨 엘아자르 앞에, 지도자들 앞에, 그리고 모든 회중 앞에 일렀다. ”(바미드바르 27:2)

 

이는 그녀들이 평생동안 이러한 수준을 유지하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수준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나타냅니다.

그녀들은 모셰에게 그녀들의 아버지가 ‘불결한 곳이 많아 아버지를 유혹할 수 있는 광야에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죄가 모셰를 대적하여 말한 것이었어도 그것은 개인적인 분노, 즉 그녀들의 아버지의 개인적인 죄인 ‘그의 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가 코락흐와 그의 회중에게 비교되었던 점은, 코락흐와 그 회중의 죄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쉠께서 이스라엘 국가와 세상을 위해 세우신 모든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코락흐의 죄는 쯜로픅하드가 확고히 붙잡고 결코 의심하지 않았던 하쉠의 말씀의 진리에 반대하는 말을 함으로 인한 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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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타라 핀하쓰 (멜락힘 알레프 18:46 – 19:21)

 

토라의 신비로움은 이번 파라샤인 핀하쓰와 하프타라의 중심 인물인 엘리야후가 동일하다는데 있습니다. (동일 인물이라는 뜻 - 역자 주)

핀하쓰는 하쉠의 영광을 위해 열심이었으며, 마찬가지로 하프타라에서도 엘리야후 예언자는 이스라엘인들의 만연했던 바알 숭배에 분노해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합니다.

그는 나중에 카르멜 산에서 민족을 모아 그곳에서 바알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이 사건은 파라샤트 키 티싸(슈모트 30-34장)의 하프타라에서 읽힙니다.

 

이 하프타라는 카르멜 산에서의 집회가 끝난 후 이스라엘인들이 중독되어 있는 우상 숭배를 버리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스라엘에 대한 엘리야후의 열정적인 비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후는 하쉠께서 ‘평화의 언약’을 맺은 핀하쓰처럼 그의 열심으로 인한 칭찬을 하쉠으로부터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는 책망을 받았으며, 전능자로부터 자신을 대신할 다른 예언자를 임명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핀하쓰와 엘리야후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핀하쓰의 행동은 다음에서 설명됩니다:

“핀하쓰가 일어나 [심판을] 중재하고…”(트힐림 106:30)

 

‘심판을 중재했다’는 히브리어는 여기서 바이팔렐(ויפלל)로 쓰이는 데, 이것은 다음의 의미를 가집니다:

핀하쓰가 미드얀 여자와 뻔뻔하게 죄를 지은 리더를 죽여 전염병을 멈추게 했다는 것인데, ‘중재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히브리어는 다른 문법에서 ‘기도하고’라는 의미로 쓸 수 있는 바이트팔렐(ויתפלל)이 됩니다. 그는 죄인들을 향해 엄격히 행동했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하쉠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현인들은 엘리야후가 같은 상황에서 ‘자비’없이 ‘심판’의 속성만 사용하였다고 가르칩니다.

 

엘리야후는 왜 하쉠의 명예만을 옹호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선 그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요?

엘리야후의 생애 동안엔 바알 숭배를 거부했던 이스라엘인이 전체에서 7천명가량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파라샤의 주제에선 한 지파만인 지므리와 쉼온 지파만 죄를 지었고, 이스라엘 절대 다수는 하쉠께 충실했습니다.

엘리야후는 악흐아브 시대의 이스라엘인들의 대규모 이탈에 낙담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쉠께선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엘리야후의 비판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람밤 이게레트 하슈마드)

 

엘리야후는 강력한 메시지들 끝에서야 하쉠께서 자신의 태도를 바꾸도록 지혜를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미래엔 항상 이스라엘 자손의 편에서 그들을 변호하겠다고 맹세했으며, 그 이후로 여전히 죽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살고 있는 엘리야후는 모든 세대에서 기도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악한 판결이 무효화될 것을 중보하고 있습니다.

엘리야후는 유대인들의 옹호자로서 자신의 역할이 지극히 큼에 따라 마지막 날의 평화의 전령으로서 선택되었습니다.

 

이 하프타라의 묘사를 통해서, 극단적인 심판성과 자비로움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라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인간과 동료 사이에 대한 ‘자유방임주의’ 문화의 옹호는 그들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도록 허용하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방식에 간섭해선 안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토라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토라는 각 유대인이 상대방의 행동에 책임이 있으며, 최선을 다해 동료를 책망해야 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교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잃어버린 영혼’의 유대인일지라도 낮고 부드러운 방식의 목소리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아담 야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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